정비사업현장서 명부 유출 잇따라 중개사 매물확보·건설사 로비 활용 사업 악영향 우려 공론화없이 ‘쉬쉬’ “엑셀파일 아닌 관린시스템 갖춰야”
# 서울 성동구의 한 재개발 사업장에서 빌라를 보유한 A씨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해당 빌라를 세놓고 경기도 고양시에 살고 있던 A씨의 집으로 어느 날 일면식도 없는 공인중개사가 찾아왔다. 중개사는 빌라를 매물로 내놓아 달라고 요청했다. A씨는 공인중개사가 자신의 실거주지 주소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의문에 빠졌다.
16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정비사업 현장에서 조합원 명부 유출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 조합원을 고객으로 삼는 이들에게 명부가 갖는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A씨 사례처럼 중개사 손에 명부가 넘어가는 사태 외에 시공자 선정을 노리는 건설사가 명부를 갖게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명부를 입수한 중개사는 조합원들에게 직접 연락해 매물을 확보할 수 있고, 건설사는 시공자 선정을 앞두고 자사를 홍보할 수 있다.
◆사업장 이미지 나빠질까 유출 사실 ‘쉬쉬’
업무상 취득한 조합원 명부를 무단으로 유출하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다. 개인정보 보호법 제59조 제2호는 업무상 알게 된 개인정보를 누설하거나 권한 없이 다른 사람이 이용하도록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를 위반하면 같은 법 제71조 제9호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조합원 명부 자체가 공개 금지 대상인 것은 아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르면 조합원이나 토지등소유자가 명부의 열람·복사를 요청하면, 추진위원장이나 사업시행자는 15일 이내에 이 요청에 따라야 한다. 다만 업무상 취득한 명부를 동의나 법적 근거 없이 중개사나 건설사에 제공하면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명부 유출이 공론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문제의식이 크지 않은 데다 부정적인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면 사업장 이미지와 자산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재건축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중개사들이 명부를 암암리에 입수해 고객을 선점하려는 일이 많았다”며 “건설사도 사업비가 부족한 초기 사업장에 자금을 대여하고 그 대가로 명부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명부 유출은 시공자 선정의 투명성도 해칠 수 있다. 명부를 입수한 건설사가 조합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접근해 상품권이나 현금을 제공하면 시공자 선정이 금권선거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OS업계 관계자는 “시공자 선정을 앞두고 건설사로부터 조합원 명부를 얼마에 팔 것인지 묻는 연락을 받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보안성 높인 관리시스템 만들어야”
일각에서는 조합원 명부 관리가 허술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비사업에서는 명부를 주로 엑셀 파일로 관리하는데 이메일이나 메신저, 클라우드 등을 통한 외부 전송과 복제가 쉽고 유출 경로를 추적하기도 어렵다.
외부업체 직원이 명부 작성·정리 업무에 참여한다는 점도 위험요인이다. 통상 조합은 총회를 앞두고 조합원 참여를 독려할 OS업체를 고용한다. OS요원이 조합원을 찾아다니며 확인한 정보를 전산직원이 취합해 명부로 정리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전산직원이 속한 소수의 전산업체가 서울 사업장 상당수의 명부 작성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A전산업체는 수도권 정비사업 총회 실무를 1000건 넘게 수행했으며 강남권과 여의도, 목동 재건축 등 대형 사업장 여러 곳에서도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조합원 명부를 엑셀 파일로 관리하는 관행이 유출 위험을 키우고 있다”며 “암호화와 접근권한 통제, 열람·다운로드 이력 기록이 가능한 보안 관리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